[Focusrite] 음악 역사상 가장 비싼 판단 미스, 데카 레코드와 비틀즈 사건 (정말 판단 착오일까?)
본문

안녕하세요. 사운드캣입니다.
요즘 주식 시장이나 코인 시장을 보고 있으면 괜히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분들 많으시죠?

"아, 내가 그때 하이닉스를 3만 원일 때 왜 다 팔아버렸을까?"
"비트코인이 몇십만 원하던 시절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리를 했을까?" 싶은 이 불타는 후회의 감정 말입니다.
참고로 저는 삼전을 10만원에 정리했답니다^^ 하하 -_-

할 때마다 투자에 성공하면 그것은 주식의 신 주신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아마 백만원만 있어도 금새 몇 달 뒤면 수천만 원이 되고 1년 정도만 되면 억대에
회사도 다닐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주신이 되고 싶어
인류 역사에는 '성공'의 역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패의 역사이며, 음악계에서도 '손가락을 부숴버리고 싶은 판단 미스'의 끝판왕이 존재합니다.
수천억 원, 아니 수조 원대의 가치를 발로 차버리고, 음악 역사에 '희대의 바보'로 기록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데카(DECCA)레코드와 비틀즈 사건입니다.
에이 또 그 이야기야? 하시는 분들 10분만 참아주세요~

바로 1962년 새해 첫날, 영국 음반사 데카 레코드(Decca Records)에서 일어난 비틀즈(The Beatles) 거절 사건
다들 아실 겁니다.
오늘은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다이브 해보실게요.
1962년 새해 첫날, 눈보라를 뚫고 찾아온 비극의 오디션
영국 런던 웨스트 햄프스테드에 위치한 데카 레코드 스튜디오.

1962년의 시작을 알리는 새해 첫날 아침, 리버풀에서 올라온 네 명의 청년과 그들의 매니저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
당시 밴드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은 데카 레코드와의 오디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게 오디션 전날 밤, 영국 전역에는 기록적인 눈보라와 안개가 몰아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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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의 지옥 같았던 상경길: 리버풀에서 런던까지는 평소 몇 시간이면 갈 거리였지만, 밴드의 매니저이자 운전사였던 닐 아스피날은 눈길 속에서 길을 잃고 10시간 이상 길바닥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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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피로에 지친 멤버들: 영하의 날씨에 히터도 제대로 안 나오는 밴 속에서 밤새 떨었던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그리고 당시 드럼을 치던 피트 베스트(Pete Best)는 오디션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영혼이 탈곡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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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었던 퍼포먼스: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데카 임원들에게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비틀즈 특유의 거친 가죽 재킷과 독일 함부르크 클럽 시절의 에너지 넘치는 록엔롤 퍼포먼스를 금지했습니다. 대신 얌전한 양복을 입히고 'Till There Was You', 'Besame Mucho' 같은 정숙하고 안전한 팝 커버곡 위주로 15곡을 부르게 했습니다.

초창기 비틀즈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피곤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데뷔 전 비틀즈의 연주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고, 드럼 박자는 불안했으며,
그들만의 독창적인 색깔은 완전히 사라졌죠.
"기타 밴드는 이제 끝물입니다" 역대급 망언(?)의 비하인드
하지만 데카 레코드에서 이를 탈락시킨 이유는 음악 자체가 끝물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딕 로우(Dick Rowe)
오디션이 끝나고 며칠 뒤, 데카 레코드의 A&R(아티스트 발굴) 총괄 책임자였던 딕 로우(Dick Rowe)는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며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언(?)을 남깁니다.
기타를 치는 밴드는 이제 끝물입니다, 엡스타인 씨. 당신네 밴드는 대중음악 시장에서 비전이 없어요.
흔히 비하인드 스토리에서는 딕 로우 혼자 비틀즈를 걷어찬 '개안 못 한 안목 부실자'로 비난받곤 합니다.
하지만 비하인드를 살짝 들여다보면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마이크 스미스(Mike Smith)
사실 오디션을 직접 진행하고 1차 평가를 내린 실무자는 딕 로우의 어시스턴트 프로듀서였던 마이크 스미스(Mike Smith)였습니다.
마이크 스미스가 오디션을 본 뒤 최종적으로 런던 출신의 다른 밴드 손을 들어주었고,
딕 로우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실무 프로듀서의 보고를 믿고 결재를 승인해 준 것에 가까웠죠.
결과론만 보면 헛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대중음악계 시각에서 딕 로우의 판단이 완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클리프 리처드와 더 섀도스 (Cliff Richard & The Shadows) / 펑크 브라더스 (The Funk Brothers)
1960년대 초반 솔로 가수가 중심이 되거나 보컬을 받쳐주는 세션 형태의 음악이 유행했고,
195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초기 록엔롤의 열기가 한풀 꺾였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는 비틀즈가 가진 진짜 무기, 즉 멤버 전원이 자작곡을 쓰고 독창적인 화성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대의 파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2013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엌... 이런 느낌 아니었겠습니까?
지금은 명실상부 KPOP 월클이죠.
EMI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은 비틀즈의 무엇을 보았나?
그렇다면 비틀즈를 집어 들어 신화로 만든 EMI 팔로폰(Parlophone) 레이블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조지 마틴(Sir George Martin)은 처음부터 비틀즈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봤을까요?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지 마틴 역시 데모 테이프를 처음 들었을 때는 "연주력이 너무 형편없다"라고 평가했고,
특히 피트 베스트의 드럼 박자에 큰 불만을 가졌습니다.
기상 악화와 긴장감 속에서 녹음된 음원만으로는 EMI 역시 비틀즈의 진가를 알기 어려웠던 것이죠.
그러나 역사적인 반전은 '인간적인 직접 만남'에서 일어났습니다.

1962년 6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멤버들을 직접 마주한 조지 마틴은 그들의 연주력 대신
특유의 뻔뻔할 정도로 유쾌한 입담, 재치 넘치는 유머, 그리고 주눅 들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와 인간적 매력에 완벽히 매료되었습니다.
테스트 녹음 후 조지 마틴이 "음향이나 세팅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라고 묻자,
스물한 살의 조지 해리슨이 씩 웃으며 "우선 당신 넥타이부터 마음에 안 드네요"라고 받아친 일화는 유명하죠.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연주 테크닉이 아닌, 아티스트 고유의 사운드와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프로듀서의 눈과 귀가 역사를 바꾼 순간이었습니다.
데카 레코드가 비틀즈 대신 선택한 '그들'은 누구였나?
저는 그런데 그게 궁금했습니다.
비틀즈를 거르고 그러면 그 오디션에서 성공한 그룹은 누구인가?
그들은 실패했는가? 아니면 유명해졌는가?
당시 데카 레코드는 비틀즈와 함께 또 다른 신인 그룹의 오디션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데카는 두 팀 중 단 한 팀만 계약하기로 결정하죠.
비틀즈를 차버리고 데카가 최종 선택한 주인공은 바로 런던 근교 출신의 '브라이언 풀 앤 더 트레멜로스(Brian Poole & The Tremeloes)'였습니다.
생소하시다구요?
처참하게 실패했을 거라고요?

브라이언 풀 앤 더 트레멜로스(Brian Poole & The Tremeloes)
데카 레코드가 비틀즈 대신 이들을 선택한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비즈니스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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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접근성: 리버풀이라는 시골 구석(?)에서 올라와 숙박비와 교통비가 많이 드는 비틀즈와 달리, 트레멜로스는 런던 근교(에식스주 다겐햄) 출신이라 언제든 불러서 녹음실에 앉힐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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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검증된 연주력: 당시 트레멜로스는 이미 지역 행사와 클럽에서 다듬어진 정교한 세션급 연주력을 보여주었고, 음반사 입장에서는 손댈 필요 없이 즉시 상품화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세단'을 사느라 '우주선'을 발로 차버린 음반사
원래 스토리가 비틀즈를 거르고 폭망했다가 되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브라이언 풀 앤 더 트레멜로스'는 이들은 1960년대 영국 음악계에서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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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싱글 차트 1위: 1963년 'Do You Love Me'라는 곡으로 영국 공식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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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탈퇴 후에도 대박: 리드 보컬 브라이언 풀이 팀을 떠난 후, 남은 멤버들(더 트레멜로스)은 1967년 'Silence Is Golden'이라는 명곡으로 다시 한번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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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핫 100 진입: 'Silence Is Golden'은 미국 시장으로 넘어가 빌보드 핫 100 차트 11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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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 공무원: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영국 싱글 차트 TOP 40에 무려 13곡이나 이름을 올렸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트레멜로스는 성공한 비즈니스였습니다.
문제는 거른 밴드가 우주적인 힛트를 했기 때문에 헛발질이 된 것 입니다.

EMI(Parlophone) 레이블
데카 레코드가 트레멜로스로 몇 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동안,
비틀즈를 줍줍한 EMI(Parlophone) 레이블은 수억 달러의 수익과 함께
음악 산업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되었습니다.
주홍글씨를 씻어낸 '롤링스톤즈' 신화
또한 데카 레코드의 경우 비틀즈를 거르고 홈런을 날립니다.
딕 로우와 그의 팀은 현재 '비틀즈를 차버린 바보'로 인식되지만
그들은 실제로 무능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조지 해리슨
1963년, 한 리버풀 음악 경연 대회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딕 로우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에게 슬쩍 다가가 조언을 구합니다.
"조지, 혹시 요즘 유심히 보고 있는 괜찮은 신인 밴드 없나?"
조지 해리슨은 런던의 클럽에서 활동하던 거칠고 반항적인 5인조 밴드를 추천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1초도 망설이지 않은 딕 로우는 즉시 런던으로 달려가 그들과 계약을 체결합니다.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
그 밴드가 바로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록의 양대 산맥을 이룬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였습니다.

이 입술로 유명함 (데카와 계약 이후 독립 레이블 시절 로고)
딕 로우는 비틀즈를 놓친 한 풀이를 하듯, 롤링스톤즈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원음 소유권과 자유로운 음악적 권한을 부여했고
롤링스톤즈는 데카 레코드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습니다.



순서대로 무디 블루스(Moody Blues), 스몰 페이시스 (Small Faces), 톰 존스(Tom Jones)
이후에도 그는 무디 블루스(Moody Blues), 스몰 페이시스 (Small Faces), 톰 존스(Tom Jones) 등
굵직한 전설들을 연이어 발굴하였습니다.
고 조지 마틴의 유산: AIR 스튜디오와 명기 Focusrite ISA 탄생
비틀즈가 조지마틴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조지마틴에게도 행운이었고요.
조지마틴은 비틀즈의 5번째 맴버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뿜어냈습니다.
비틀즈라는 원석을 다듬어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힌 조지 마틴의 혜안은 훗날 음향 장비 역사에도 거대한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AIR 스튜디오
1965년 독립 프로듀서가 된 조지 마틴은 음반의 가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로 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전설적인 녹음실인 런던 애비로드의 AIR 스튜디오(AIR Studios)입니다.
여기서 AIR는 공기가 아니라 Associated Independent Recording 즉, 독립된 스튜디오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당시 음악 스튜디오를 만든다는 것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는
일이어서 EMI 같은 음반사들이나 소유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지 마틴은 최고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기로 하고
여기에 세계 최고의 레코딩 콘솔을 설치하기로 하죠.

루퍼트 니브(Rupert Neve)
1985년, 조지 마틴은 당시 전설적인 음향 엔지니어 고 루퍼트 니브(Rupert Neve)에게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압도적인 마이크 프리앰프를 장착한 콘솔을 만들어 달라"고 특별 의뢰를 맡깁니다.
루퍼트 니브가 당시 니브 일렉트로닉스를 AMS에 매각하고 10년후에 세운 회사가 바로

포커스라이트 입니다.
이렇게 AIR 스튜디오만을 위해 탄생한 한정판 마이크 프리앰프 모듈(ISA 110)과 전설적인 포르테 콘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전 세계 프로듀서와 뮤지션들의 표준이 된 포커스라이트(Focusrite) 브랜드의 시초였습니다!

< ISA 110을 여러대 배치해서 만든 포커스라이트 포르테 콘솔 >

< 포커스라이트 마이크 프리 앰프를 소개하는 조지마틴의 살아 생전 모습 >
60년 전 해프닝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데카 레코드가 비틀즈를 탈락 시킨 사건은 바보의 오판처럼 보이지만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사업에 대중의 트랜드는
런던 날씨 처럼 변화 무쌍하다보니 자주 일어나는 일중 하나입니다.
엔터테인먼트사의 아티스트에 대한 투자는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는 그런 도박과도 같습니다.
이 비틀즈 사건으로 인하여 흔히 이런 말들이 많습니다.

컨디션 난조 상태의 단면만 보고 평가하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만약 그 때 비틀즈가 버벅이지 않고 연주를 잘했다면 아마 데카에서도 계약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버벅거리는데 어떻게 깊이 숨겨진 재능을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부채도사가 필요해~

안정적으로 보이고 무난한 선택을 하지 말 것?
그렇다면 도박수를 던지라는 이야기인데
그러다가 망한 회사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순간적인 오판으로 회사가 엎어진 사례가 특히 많은게 엔터테인먼트 업계입니다.
데카가 비틀즈를 거르고 계약한 밴드와 이후를 보면
매우 뛰어난 능력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1962년 새해 첫날 눈이 오지 않아 비틀즈가 길을 잃을 일도 없고
완벽한 컨디션으로 오디션을 보았다면 대중음악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날 데카 레코드에는 신의 손길이 없었던 것 뿐.
데카 레코드에서 당시 비틀즈를 거른 것은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코 그들이 바보거나 판단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여러가지 사정으로 운이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당시 비틀즈와 계약한 EMI도 만약 그 상태였다면 계약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리에게 찾아올 다음 '롤링스톤즈'를 기다리며
처음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하이닉스 3만 원일 때 왜 다 팔아버렸을까?"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혹은 홈 스튜디오 장비를 세팅하고 음악 작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데카 모먼트'를 만납니다.

철저한 스펙과 가성비를 계산해서 들인 장비가 생각보다 맞지 않거나,
헐값에 중고로 넘겨버린 마이크나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나중에 명기로 재평가받아 떡상하는 슬픈 일들 말이죠.
투자에서도, 음악에서도 당일의 컨디션이나 악재(눈보라) 때문에 잠시 판단이 어긋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손절에 얽매여 자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데카 레코드의 딕 로우가 뼈아픈 실수를 딛고 조지 해리슨의 추천을 받아들여 '롤링스톤즈'라는 대어(大魚)를 낚아챘듯,
우리 역시 실패를 발판 삼아 다음 기회를 향해 귀와 마음을 열어두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투자 포트폴리오든, 여러분의 음악 스튜디오든 지나간 버스에 미련을 두지 마세요.
과거의 실수는 그저 그날 날씨가 조금 안 좋았을 뿐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포트폴리오와 스튜디오 속에서 숨어있는 '미래의 비틀즈'와 '롤링스톤즈'를 발견해 내기를,
그리고 여러분의 소리를 완벽하게 담아낼 최고의 파트너(Focusrite)와 함께 내일의 멋진 도전을 이어나가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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